부여 군수리 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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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부여 군수리 사지는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군수리에 위치한 6세기 중엽 창건된 백제 시대 사찰로 추정된다. 1탑 1금당의 가람 배치를 보이며, 중문, 목탑, 금당, 강당의 흔적이 확인되었다. 1935년과 2005년부터 2022년까지의 발굴 조사를 통해 금동보살입상, 석조여래좌상, 칠지도 등 다양한 유물이 출토되었다. 특히 칠지도는 백제와 일본의 문화 교류를 보여주는 중요한 유물로 평가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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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 군수리 사지 - [유적/문화재]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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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 |
이름 | 부여 군수리 사지 (扶餘 軍守里 寺址) |
영문 이름 | Temple Site in Gunsu-ri, Buyeo |
종류 | 사적 |
지정 번호 | 44 |
지정일 | 1963년 1월 21일 |
주소 |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군수리 19번지 |
시대 | 백제 |
면적 | 11,213m2 |
2. 역사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군수리에 있는 부여 군수리 사지는 6세기 중엽쯤에 창건된 가람으로 추정된다. 남쪽으로부터 중문, 탑, 금당, 강당이 차례로 배치되었고, 금당 좌우와 강당 좌우에는 각각 건물터(금당으로 추정)와 종루(鐘樓)·경장(經藏)으로 추정되는 건물터가 있다. 각 건물터는 나란히 놓인 평기와(平瓦列)로 구분되며, 탑터는 초석 배치로 보아 정면 9칸(間) 건물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탑터 중심부 지하에서는 금동보살입상, 석조여래좌상 등 불상과 다수의 공예품이 발굴되었다. 특히 금당 3동(棟)이 동서 방향으로 나란히 배치된 점이 주목된다.[2]
2. 1. 창건과 가람 배치
부여 군수리 사지는 6세기 중엽쯤에 창건된 가람으로 추정된다. 남쪽에서부터 중문, 탑, 금당, 강당이 차례로 배치된 구조이며, 금당 좌우에는 건물터가 하나씩 있고(역시 금당으로 추정됨), 강당 좌우에는 종루(鐘樓)와 경장(經藏)으로 추정되는 건물터가 하나씩 있다.각 건물터의 윤곽은 나란히 놓인 평기와(平瓦列)로 구분된다. 탑터는 초석 배치로 보아 정면 9칸(間) 건물이었던 것으로 보이며, 탑터 중심부 지하에서는 금동보살입상, 석조여래좌상 등 불상과 다수의 공예품이 발굴되었다. 특히 금당 3동(棟)이 동서 방향으로 나란히 배치된 점이 주목할 만하다.
2. 2. 발굴 조사
1935년 일본인에 의해 조사되었는데, 그 결과 중문·목탑·금당·강당이 남북으로 일직선상에 배치된 1탑 1금당의 구조임이 밝혀졌다. 또한 목탑, 금당, 강당 터 등이 조사되면서 금동제 불상과 기와, 전돌 등이 출토되어 백제시대 사찰로 확인되었다. 백제 사찰에서의 1탑 1금당의 가람배치는 이 절터에서 처음으로 확인되었다.[2]이후 2005~2007년, 2011년에 정확한 가람배치와 규모를 확인하고자 금당지, 목탑지, 동편 일대에 대한 조사도 진행되었다. 그러나 중문터는 일제강점기에 목탑 터 남쪽에서 발견한 기와 무더기 인근에 위치할 것으로 추정만 되었을 뿐 그 실체를 파악하지 못하였다. 중문터는 2022년 조사를 통해 목탑 터를 중심으로 남쪽으로 약 25m 떨어진 곳에서 남동쪽 모서리에 놓인 기단석과 기와 무더기가 발견되면서 그 정확한 위치와 규모가 파악되었다.[2]
목탑의 중심부에서는 군수리 금동미륵보살입상, 군수리 석조여래좌상과 칠지도, 철못, 삼족토기를 비롯한 토기류가 출토되었다. 이 중 특히 주목되는 것은 칠지도이다. 칠지도는 중심에서 양쪽으로 각각 세 가지씩 칼이 뻗어있어 7개의 칼날을 가지고 있는 칼이다. 이와 비슷한 백제 칠지도 하나가 일본에 있어 백제와 일본의 문화 교류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
3. 구조
절터에서는 유물이 골고루 출토되었다. 강당터 남쪽에서 금동관 조각이 나왔고, 금당터 주위와 탑터에서는 약 1,150점의 옥, 금당 서쪽에서는 금동제 방울, 구두 모양의 금속 장식구가 출토되었다. 또한 연꽃무늬, 덩굴무늬가 조각된 상자 모양의 벽돌과 금제 고리, 작은 구슬을 비롯한 많은 유물이 출토되었다.[2]
3. 1. 건축 구조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군수리에 있으며 6세기 중엽쯤에 창건된 가람으로 추측된다. 그 구조는 남쪽으로부터 중문·탑·금당·강당이 세워진 흔적이 보이며, 금당 좌우로는 건물지 각 한 개씩(역시 금당으로 추측됨), 그리고 강당의 좌우에는 종루(鐘樓)·경장(經藏)이라고 생각되는 건물지가 한 개씩 보인다. 각 건물지의 윤곽은 병치된 평와열(平瓦列)로 구획되고 있으며, 탑지는 초석의 배치로 보아 정면 9간(間)의 건물이었다고 믿어진다.[2] 탑지 중심부의 지하에서 금동보살입상·석조여래좌상 등 불상을 비롯하여 다수의 공예품이 발굴되었다. 금당 3동(棟)이 동서 방향으로 병립해 있는 점이 주목된다.금당터의 기단은 기와를 쌓아 만든 것이 특징이다.[2]
목탑과 금당의 기단은 벽돌이나 기와를 세우거나 쌓아서 만든 것인데 반해, 중문과 남회랑의 기단은 돌로 만든 석축기단이 특징이다. 중문의 기단 규모는 동서 길이로 약 14m로 추정된다. 또한 남회랑터에서도 남쪽 기단석과 기와 무더기 일부를 확인하였는데, 중문과 남회랑의 서쪽 부분은 사찰 폐기 후 축조된 백제시대 도로(남-북 방향)로 인해 심하게 파괴된 상태였다. 남회랑의 경우 중문보다 좁은 기단을 갖춘 채 동쪽으로 약 10m 이어진 것으로 본다. 중문의 기단석은 ‘ㄱ’자 형태로 잘 다듬은 모서리 지대석(地臺石)으로, 그 윗면에 턱이 마련되어 있어서 이곳에 우주석(隅柱石)을 끼워 놓고 그 위에 납작한 갑석(甲石)을 얹은 가구식(架構式) 기단 구조로 추정된다.[2]
3. 2. 칠지도와 기단
목탑의 중심부에서는 군수리 금동미륵보살입상(구 보물 제330호)·군수리 석조여래좌상(구 보물 제329호)과 칠지도·철못·삼족토기를 비롯한 토기류가 출토되었다. 이 중 특히 주목되는 것은 칠지도인데, 중심에서 양쪽으로 각각 세 가지씩 칼이 뻗어있어 7개의 칼날을 가지고 있는 칼이다. 이와 비슷한 백제 칠지도 하나가 일본에 있어 백제와 일본의 문화교류의 한 단면을 말해주고 있다.[2]금당터의 기단은 기와를 쌓아 만든 것이 특징이며, 목탑과 금당의 기단이 벽돌이나 기와를 세우거나 쌓아서 만든 것인데 반해, 중문과 남회랑의 기단은 돌로 만든 석축기단이 특징이다. 중문의 기단 규모는 동서 길이로 약 14m로 추정된다. 중문의 기단석은 ‘ㄱ’자 형태로 잘 다듬은 모서리 지대석(地臺石)으로, 그 윗면에 턱이 마련되어 있어서 이곳에 우주석(隅柱石)을 끼워 놓고 그 위에 납작한 갑석(甲石)을 얹은 가구식(架構式) 기단 구조로 추정된다.[2]
4. 출토 문화재
1935년 일본인에 의해 조사된 결과, 중문·목탑·금당·강당이 남북으로 일직선상에 배치된 1탑 1금당의 구조임이 밝혀졌다. 목탑터, 금당터, 강당터 등에서 금동제 불상과 기와, 전돌 등이 출토되어 백제시대 사찰로 확인되었다. 백제 사찰에서의 1탑 1금당의 가람배치는 이 절터에서 처음으로 확인되었다.[2]
이후 2005~2007년, 2011년에 정확한 가람배치와 규모를 확인하고자 금당지, 목탑지, 동편 일대에 대한 조사가 진행되었다. 중문터는 2022년 조사를 통해 목탑터 남쪽으로 약 25m 떨어진 곳에서 기단석과 기와 무더기가 발견되면서 정확한 위치와 규모가 파악되었다.[2]
금당터의 기단은 기와를 쌓아 만든 것이 특징이며, 유물은 절터에서 골고루 출토되었다.[2] 강당터 남쪽에서 금동관 조각이 나왔고, 금당터 주위와 탑터에서는 약 1,150점의 옥, 금당 서쪽에서는 금동제 방울과 구두 모양의 금구가 출토되었다. 또한 연꽃무늬와 덩굴무늬가 조각된 상자 모양의 벽돌, 금제 고리, 작은 구슬을 비롯한 많은 유물이 출토되었다.
4. 1. 불상
- 부여 군수리 석조여래좌상 - 보물 제329호이다.
- 부여 군수리 금동보살입상 - 보물 제330호이다.
4. 2. 기타 유물
목탑의 중심부에서는 군수리 금동미륵보살입상(구 보물 제330호)·군수리 석조여래좌상(구 보물 제329호)과 칠지도, 철못, 삼족토기를 비롯한 토기류가 출토되었다.[2] 이 중 특히 주목되는 것은 칠지도인데, 중심에서 양쪽으로 각각 세 가지씩 칼이 뻗어있어 7개의 칼날을 가지고 있다. 이와 비슷한 백제 칠지도 하나가 일본에 있어 백제와 일본의 문화 교류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금당터의 기단은 기와를 쌓아 만든 것이 특징이며, 유물은 절터에서 골고루 출토되었다.[2] 강당터 남쪽에서 금동관 조각이 나왔고, 금당터 주위와 탑터에서는 약 1,150점의 옥, 금당 서쪽에서는 금동제 방울과 구두 모양의 금구가 출토되었다. 또한 연꽃무늬와 덩굴무늬가 조각된 상자 모양의 벽돌, 금제 고리, 작은 구슬을 비롯한 많은 유물이 출토되었다.
참조
[1]
웹사이트
http://www.cha.go.kr[...]
[2]
웹인용
문화재청
https://www.cha.go.k[...]
2022-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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